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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82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45 - 90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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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片康烈의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 박 경 본고는 독립운동가 片康烈의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과 중만주지역에서의 의열투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892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편강렬은 1907년 16세의 나이에 李康秊부대에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08년 경기도 양주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의병활동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당시 서북지방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던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숭실학교에 입학했으며, 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나 신민회에 가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조작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즉,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편강렬은 105인 사건 연루를 계기로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914년에 출옥한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으로 내려가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大韓光復會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연백군의 3ㆍ1운동을 주도했다. 3ㆍ1운동 이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군사조직인 黃海道籌備團에 참여해 안악군의 대표를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은닉하고 군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1년 2개월간 해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22년 1월 출옥한 편강렬은 국외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의열투쟁을 목표로 1923년 7월 義成團을 조직하고 길림, 장춘, 카륜 등 중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성단의 주 활동은 일본인과 친일한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관공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지방조직과 연락기관을 설치하여 세력을 넓히는 동시에 국내로의 잠입을 시도했고 폭탄사건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편강렬은 중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이주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으며, 양기탁과 함께 전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그 결과 1925년 남만주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인 正義府가 조직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편강렬은 1924년 7월 의성단에 잠입한 밀정의 밀고로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6개월 간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7년형을 받게 되었다. 신의주형무소 독방에서 복역하던 그는 지병이 악화되어 1927년 4월 보석으로 출옥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1929년 1월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편강렬은 그동안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편강렬은 16살의 어린 나이에 의병에 가담하여 38살에 순국하기까지 한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20여년의 그의 독립운동을 돌아보았을 때, 편강렬은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의열투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 등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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